거문도 풍력 선구자, 50년 후 풍력에 반대하다

1974년 풍차 개발자 김태수 씨 인터뷰

1974년 거문도 서문 마을회관 옥상에 풍차를 설치하고 있는 김태수 씨(당시 32세). 대한뉴스 갈무리.

1974년, 마을회관 옥상의 풍차

1974년 8월 10일 대한뉴스는 전남 거문도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특별한 이야기를 전했다. 남해 외딴 섬에 풍차 발전소가 생겼다는 소식이었다. 석유파동으로 에너지 위기를 겪던 시절, 한 섬마을 주민이 직접 바람으로 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살아지구는 그 주인공 김태수(84세)씨를 지난 5일 거문도 서도리 죽촌마을 자택에서 만났다. 5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두웠다.

“풍차(풍력발전)가 들어오면 거문도 어장은 끝이야.”

전라남도 여수시 거문도 해역(2025.11.05)ⓒ살아지구

바람에 끌렸던 소년

김씨가 풍력을 처음 생각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서도국민학교 33회 졸업생으로 70여년 전 운동장을 보며 전원 개발 구상을 처음 했다고 한다.

“겨울철에 1, 2학년 애들은 바람에 날아갈 정도였어. 북풍이 바다에서 바로 불어오니까 섬에 걸리는 데가 없잖아. 그때 생각했지. 이 바람으로 전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호기심 많은 소년은 아버지 몰래 함석 지붕을 잘라 바람개비를 만들기 시작했다. “체구가 작은 애들은 물어 갈 정도로 많은” 거문도 바람이라면 실현 가능할 것이라 믿었다. 바람의 각도를 조절하고, 회전 속도를 관찰하며 풍력의 원리를 스스로 터득해갔다. 여러 자료에서 본 덴마크의 풍차는 그에게 큰 영감을 줬다.

1974년 풍차를 설치했던 거문도 서도 마을회관 옥상. 현재는 김태수 씨 집이다.(2025.11.05)ⓒ살아지구

1973년 당시 한국은 석유파동으로 에너지 위기를 겪고 있었고, 전력 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에너지 자립이 국가 안보와 직결됐던 시기, 김 씨는 오랫동안 품어온 풍차의 꿈을 실현해보기로 했다. 

김씨는 군 복무 시절 익힌 전기 기술을 바탕으로 1973년 11월, 당시 이복산 면장으로부터 사재 20만원을 받아 자기 집 뒤뜰에 초속 5~7m 바람에 작동하는 4개 날개 풍차를 설치했다. 그러나 전기 생산에 필요한 분당 1800회전(1800 RPM))에 크게 미달했고, 첫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김태수 씨를 보도한 1974년 8월 2일자 경향신문. 자료=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50만 원으로 시작한 재도전

뜻밖의 지원군이 나타났다. 마침 섬에 들른 김홍영 여천 군수(당시 거문도 행정구역은 전라남도 여천군에 속함)가 가능성을 보고 군비 50만 원을 지원해 줬다. 김씨는 실패를 거름삼아 이번엔 여섯 날개 풍차를 제작했다.

완성된 풍차는 초속 4m 바람만 있어도 섬마을 20가구 주민들이 쓸 수 있는 발전량을 냈다. 제작비 40만 원에 내선공사까지 합쳐 100만 원이 들었다.

“그놈을 돌려서 전기가 나오니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등잔불에 의지했던 서도 마을에 전깃불이 밝았다. 덕분에 텔레비전 시청도 가능했다. 언론은 ‘15년은 전기료 한 푼 안 들이고 전기불을 켤 수 있게 됐다’고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현실은 순탄치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풍에 기계가 고장났다. 

“어느 날 바람이 세게 불어서 샤프트(회전축)가 툭 부러져버렸어. 사람이 다칠 뻔했지.”

이 사고를 통해 그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 때 자동으로 날개를 멈추거나 각도를 조절하는 고도의 자동 제어 시스템이 필요했다. 독학으로 공부했던 그는 상용화를 위한 기술적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김태수 씨가 풍력발전기를 만들기 위해 모았던 자료들(2025.11.05)ⓒ살아지구

공식 기록상 국내 최초 풍력발전기는 1975년 2월 한진그룹이 제주 제동목장에 설치한 3kW급이다. 그러나 김태수 씨는 이보다 먼저 순수 국내 기술로 풍력발전을 실현했다.

“혼자 힘으로는 안 되겠더라. 전문적인 기술과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분야였어. 풍력 연구를 더 하고 싶어서 아내와 함께 제주도도 다녀오고 했었지. 그들이 가진 풍차가 어디서 왔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조사도 하고, 발전기 돌아가는 것도 보고”

50년 후, 그는 풍력을 어떻게 생각할까

풍력발전 사업에는 주민 동의가 필수다. 이 때문에 사업자들은 금전이나 물품 지원을 통해 주민 수용을 이끌어낸다. 거문도 앞바다에도 2025년 11월 현재 대규모 해상풍력단지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사업자는 김태수 씨에게도 350만 원 상당의 전자제품을 제공하며 사업 동의를 구했다고 했다.

김태수 씨는 “땅을 주는 값으로 이런 걸 주는 것”이라며 “사실상 (풍력단지가 들어서면) 거문도 어장은 끝”이라고 했다.

“풍차가 세워지면 운영 시 소음과 진동이 발생해. 바다는 잔잔하기 때문에 조금만 진동해도 멀리까지 전달되지. 거기서 산란하는 고기들은 다 떠나버릴 거야.”

살아지구와 인터뷰를 마치고 선착장까지 배웅하는 김태수 씨(2025.11.05) ⓒ살아지구

그는 멸치가 거문도 앞바다에서 산란하고, 그 멸치를 먹으러 삼치와 갈치가 따라오는 생태계를 설명했다. 수십 km에 달하는 해저 송전선로 역시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류가 흐르면 주변 고기들이 살 수가 없어. 한번 황폐화되면 회복하는 데 수 백 년은 걸려. 거문도 사람들은 어업으로 먹고사는데 ...”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어차피 바다만 의존해서는 답이 없다고 덧붙였다. 기후변화로 수온이 상승하면서 연안 사막화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그는 거문도 사람들의 새로운 생계 방안을 구상 중이라고 했다.

문화로 살리는 섬

그렇다면 김씨가 생각하는 거문도의 미래는 무엇일까. 그는 집 안 가득한 고문서와 자료를 펼쳐 보였다.

“어족자원은 이미 끝났어. 이제는 문화자원으로 살아야 해.”

김태수 씨 작업실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손수 만들었던 풍차(2025.11.05) ⓒ살아지구

그가 주목한 것은 거문도의 역사적 가치였다. 18세기부터 거문도 어민들이 울릉도와 독도를 오가며 조업했던 기록, 1885년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그의 아버지 김병순씨가 남긴 방대한 독도 관련 문헌.

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는 올해 6월 ‘‘울릉도·독도 관련 「거문도 김병순 자료」 연구’ 논문을 게재했다. 논문은 ‘김병순 자료’를 “비록 관찬사료와 같이 공신력과 객관성이 부족할 수 있지만, 기존 울릉도·독도 관련 거문도 자료에 신뢰성을 더할 수 있는 개인 기록물”이라고 했다. 김 씨는 전라남도 지정 문화유산 신청을 진행 중이다.

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가 발간한 '울릉도·독도 관련 거문도 자료'. 김태수 씨는 아버지 '김병순 자료'가 해당 연구에 활용됐다고 설명했다. (2025.11.05) ⓒ곽찬 동국대 학생

“거문도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섬이야. 4대가 효열을 행한 집안의 효열문,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거문도 뱃노래… 이런 것들을 알리고 문화관광으로 사람들을 불러야 해.”

에너지 전환의 딜레마

김 씨는 재생에너지 전환의 필요성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섬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김태수 씨가 자택 옥상에 설치한 태양광 패널. (2025.11.05) ⓒ살아지구

“전기는 생산해야 하지만, 그게 왜 꼭 이 바다여야 하나. 수백 개 풍력발전기가 세워지면 외국 회사만 돈 벌고, 우리는 바다를 뺏기는 거야. 전문가는 아니지만 풍력을 잘 알아. 그래서 더 반대하는 거지.”

김 씨는 우리를 집안 곳곳으로 안내했다. 지하에는 빗물 저장 탱크가 있고, 옥상에는 태양광 패널이 설치돼 있다. 직접 만든 난로로 나무를 때워 난방을 한다. 나무는 지천에 버려진 걸 주워 온다고 했다. 방과 작업실엔 공구들이 가득했다. 그는 “전기요금이 거의 나오지 않는 집을 직접 다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50년 전 풍력발전을 꿈꿨던 그 소년은 지금도 에너지 자급자족을 실천하고 있었다. 어쩌면 대한민국 에너지 전환의 답은 김태수 씨 집에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마지막 배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김 씨는 배가 떠날 때까지 취재진을 배웅하며 서 있었다. 바다 위로 그의 말이 맴돌았다.

대한민국, 그러니까 서울만 먹고 살 것이 아니라 지금 (어족)자원이 없으면 섬 사람들은 누가 살려줄 거냐 그거야. 거문도 사람들을 먹고살게 하려면 제2의 먹거리를 고민해야지. 이 얘기를 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1974년 김태수 씨가 소개된 대한뉴스 제 955호


1974년 8월 10일 대한뉴스 제 995호.

박소희 기자 ya9ball@disappearth.org 메일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