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력 높은 우당탕탕 너구리를 연구하다

적응력 높은 우당탕탕 너구리를 연구하다

편집자 주 - 살아지구의 구구구 프로젝트는 ‘연구가 지구를 구한다’의 줄임말입니다. 연구가 지구를 구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살아지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인 ‘모든 생명이 살기 더 나은 세상’은 지금의 제도만 잘 지키거나, 인간과 지구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습니다. 새롭게 발견한 학문적 사실을 기반으로 우리 사회가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때 비로소 ‘모든 생명이 살기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살아지구는 연구자와 기자 협력 모델을 선택했습니다. 학문이 추구하는 정밀성과 언론이 추구하는 대중성을 결합하기 위해서입니다. 살아지구는 구구구 프로젝트로 그동안 널리 알려지지 않고 학문 영역에서 다뤄지던 ‘지구를 구하는 데 필요한 소식’을 알기 쉽게 전합니다.

프로젝트 일환으로 최서윤 서울대학교 산림환경학전공 야생동물학연구실 박사과정 연구원이 너구리 연구에 관해 연재합니다. 최서윤 연구원은 도시 너구리와 시골 너구리를 추적하며 그들의 행동을 연구합니다.

너구리 연구자의 일과는 출근하기 전날 밤, GPS로 추적 중인 너구리가 어떻게 이동했는지 확인하는 데서 시작한다. 휴대폰 어플리케이션을 켜고 야생 너구리들 몸에 부착한 GPS 추적장치에서 수신한 좌표를 확인한다. 그중 서울시 양천구 연의공원 근처에 멈춰있는 너구리가 눈에 들어온다. 너구리에게 걸어준 GPS 목걸이가 떨어졌거나, 너구리가 죽었다는 신호다.

다음 날, 빠르게 나갈 준비를 하고 등산복을 입고 등산화를 신는다. 오전에는 양천구 지양산 인근에서 GPS 목걸이를 찾고, 오후에는 너구리 포획을 위해 학교 뒷산에 설치한 연구용 포획 틀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작업을 해야 한다. 결국 이날 오전 2시간을 수색한 결과, 지양산 가장자리 아파트 단지 옆 언덕 수풀 속에서 너구리 목에 달았던 GPS 목걸이를 찾아냈다. 다행히 너구리가 죽은 것이 아니라 GPS 추적장치가 헐거워져 떨어진 것이었다. 오후에는 학교로 이동해 너구리 포획 틀을 옮기느라 하루를 거의 다 보냈다.

너구리 연구를 시작하기까지

야생동물 연구는 야생동물에 대한 깊은 관심과 함께 개를 향한 애정에서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개를 유독 좋아했던 나는 고등학교 졸업논문으로 양치기 개 보더콜리의 국내 계통 역사와 기원을 추적했다. 이후 개과 야생동물인 코요테 도시생태 연구팀에서 자원봉사와 학부 연구생을 하며 연구에 발을 디뎠다. 뒤이어 스칸디나비아 멸종위기종인 북극여우 보전과 연구에 5-6년 간 몸을 담았다. 국내에서는 무슨 연구를 해야 할까 고민하다 너구리를 연구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개과 야생동물이기 때문이다.

북극여우를 연구하던 시절 촬영한 북극여우들

너구리 연구를 고민할 때만 해도 너구리에 대해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만 같았다. 너구리 연구로 과연 연구비를 모을 수 있을까 고민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연구를 시작하던 시기인 2022년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도시에 종종 나타나는 너구리에게 대중적 관심이 조금 생겨날 때였다. 비록 너구리를 향한 애정보다는 너구리가 일으키는 사고 대처를 고민하는 종류의 관심이었지만 말이다.

당시 물림 사고와 같은 부정적인 기사가 언론보도로 나타났고, 특히 도시 지역에서 발견되는 사례가 많았다. 이런 현상은 학술 용어로 ‘야생동물과 인간 간 접촉 증가’ 혹은 이에 따른 ‘인간-야생동물 간 갈등 심화’라고 말하며, 야생동물 관리에 있어 주된 연구 주제다.

너구리 수 자체가 늘어나는지 정확한 연구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당시 너구리 구조 건수 및 관련 민원이 늘고 차량 충돌 사고도 증가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즉 도시 지역에서는 확실히 접촉이 증가한 것이다. 구조나 차량 충돌 사례만 보면 너구리가 사고뭉치인 것처럼 보이지만, 같은 시기 너구리가 겪는 고충도 늘어났다.

너구리와 인간 간 접촉 증가는 너구리 특성인 ‘높은 적응력’에서 기인한다. 너구리는 급변하는 환경에 잘 적응한다. 원래 너구리는 숲 가장자리를 선호하고, 하천의 습지 공간도 잘 이용하며 살아간다. 사람이 많은 도시에 살게 되면서는 각종 도로나 건물 때문에 파편처럼 잘라진 도시 녹지 공간에도 잘 적응한다. 식습관 면에서도 까다롭지 않게 다양한 종류의 먹이를 먹는 ‘일반종’이다.

가까운 나라의 예를 봐도 비슷한 추세가 나타난다. 일본과 중국 대도시에서 너구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녹지 공간이 극히 드문 아스팔트 정글 속에서도 너구리가 서식하는 지역이 있고, 그곳에서 큰 규모의 집단을 이룬다는 보고가 있다. 한국 너구리 역시 도시 공간에 점점 더 잘 적응할 수 있겠다는 예상이 가능하다.

도시 너구리와 시골 너구리

사람의 삶에서 중심이 의식주라면, 옷을 입지 않는 너구리를 대상으로 한 연구 주제는 식과 주가 중심이다. 그중에서도 우리 팀이 현재 진행 중인 연구는 ‘주’에 해당하는 ‘사는 곳’과 ‘이동하는 양상’이다. 연구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문은 '너구리가 이 땅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을까', '도시화에 따라 너구리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이다. 

숲과 가까운 지역에 사는 시골 너구리와 새로운 환경인 도시에 적응한 도시 너구리는 행동에서 여러 흥미로운 차이를 보인다. 그중 하나가 부모로부터 독립을 의미하는 ‘분산 행동’이다.

시골 산림이나 언덕이 많은 지대(구릉)에 사는 너구리는 4월에서 5월 쯤에 태어나 빠르면 9월에 부모로부터 독립한다. 너구리마다 다르지만 부모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지는 사례도 있다. 연구 대상 중에는 DMZ를 넘어 추적 신호가 사라진 새끼 너구리도 있고, 큰 강을 여러 번 건너 태어난 곳에서 15km 떨어진 새로운 땅을 찾은 새끼 너구리도 있었다.

하지만 도시에서는 달랐다. 대도시의 어린 너구리가 부모로부터 독립해 새로운 서식처를 찾은 사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다. 어린 너구리 중 몇몇은 주변 환경을 탐색하며 독립을 시도하는 듯 했으나, 멀리 가지 못하고 주변을 탐색하다 결국 원래 서식처로 돌아왔다. 

어린 너구리

큰 도로와 사람, 그리고 빠른 자동차는 어린 너구리가 홀로 새로운 여정을 떠나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무서운 장애물일 것이다. 또한 도시에서 이미 밀집되어 있는 큰 너구리 무리가 어린 너구리의 새로운 정착을 방해할 가능성도 있다. 도시 너구리가 다 큰 후 분산을 시도해 먼 길을 떠난 경우도 있지만, 길을 잘못 들어 살 곳을 찾지 못하고 로드킬을 당한 사례도 있다.

다만 대부분의 도시 너구리는 자신의 행동 반경에 있는 도로를 영리하게 이용하고 있다고 보인다. 최근 너구리 34마리의 도로 이용을 분석한 결과, 시골 너구리와 달리 도시 너구리는 도로를 피하지 않고 잘 이용한다. 도시 너구리는 건너는 위치나 건널 때의 시간대, 행동 전략을 영리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한 속도가 낮거나 통행량이 적으면 차선이 큰 도로라도 빈번하게 이용했다. 적응력이 뛰어난 너구리 특성상 앞으로 도로나 인간 구조물에 잘 적응하는 너구리가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이런 행동 변화는 너구리가 사라졌던 대도시 공간에 이들이 다시 침투할 요인이 될 수 있다.

인간이 사는 공간 속 너구리

도시에 너구리가 늘어나고 이들이 빠른 적응력을 가졌다고는 해도, 도시가 너구리에게 살기 쉬운 공간은 아니다. 너구리는 고라니에 이어 교통사고를 가장 많이 당하는 야생동물이다. 차량과 충돌하면 너구리는 죽거나 다치고, 사람 입장에서는 차량 피해를 입을 수 있다. 또 도시 특성상 좁은 곳에 많이 모여 살게 돼 전염병이 유행할 위험이 비교적 높다.

너구리는 원래 겁이 많아 죽은척을 하기로 유명하지만, 사람에게 지나치게 익숙해진 너구리는 오히려 겁을 상실해 먹이를 구걸하거나, 자신에게 해를 가한다고 여기면 공격할 수도 있다. 또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은 산책 중 만난 너구리가 개선충이나 바이러스 등 병을 옮기거나 공격하지 않을지 걱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너구리와 인간 간 접촉은 서로에게 곤혹스러운 점도 있다.

우리 팀은 다른 연구에 앞서 너구리가 어디 살고, 어떻게 이동하는지, 왜 인간이 사는 공간에 들어오는지 파악 중이다. 너구리가 도로를 건너는 수고를 감수하고 인간이 거주하는 공간에 들어오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현재까지 우리 팀이 주요하게 생각하는 원인은 아래 네 가지다.

첫 번째는 너구리가 도시로 변하기 전부터 그 땅에 살던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부터 있던 작은 구릉, 초지, 혹은 메꿔버린 습지는 너구리가 원래 살고 있던 공간일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는 너구리가 탐색을 하며 새로운 공간을 찾고자 하는 시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이런 탐색기에는 너구리의 도시 진입이 빈번히 발생했다. 
세 번째는 먹이원이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먹을 것이 풍부하다. 음식물 쓰레기, 길고양이를 위해  놓인 질 좋은 사료 등 쉽게 얻을 수 있는 고영양분 먹이를 먹성 좋은 너구리가 거부할 리 없다. 실제로 도시 너구리는 산림 너구리보다 훨씬 뚱뚱했다.
마지막으로 질병이다. 질병에 걸려 약해진 너구리는 따뜻한 온기와 손쉬운 먹이를 위해 도시로 온다. 너구리 사이에서는 개선충이 가장 흔한 전염병인데, 개선충에 걸린 너구리는 털을 모두 잃고 사냥 능력을 잃는다.

위에서 밝힌 다양한 원인이 서로 얽혀 너구리가 사는 공간과 인간이 사는 공간이 겹쳐지고, 이로 인해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도시화에 따른 너구리 행동 변화는 급변하고 있다. 이들을 이해하고 너구리와 인간이 공존할 전략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 팀은 2022년부터 경기도 연천군, 파주시, 고양시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이들 지역은 도시와 농촌이 어우러진 곳이다. 도시와 농촌이 혼재한 지역은 도시에 가까워질수록 너구리 행동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기 쉬워 연구 지역으로 선정했다. 우리 팀은 이 지역에서 여러 방면의 비교를 해 너구리 적응력을 평가하고, 향후 비슷한 행동을 보이는 집단(개체군)이 미래 어떻게 움직이고 변할지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현재는 도심 지역 너구리 행동을 좀 더 중점적으로 보기 위해 서울시와 인근 경기 지역까지 연구를 확장했다.

건강한 너구리, 건강한 도시

사람이 우려하는 질병이나 차량 충돌 및 직접적인 마찰 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너구리의 삶이 건강해져야 한다. 건강한 너구리 개체군을 유지하고 사람과의 갈등을 줄이기 위한 최우선 방법은 너구리와 거리두기다. 사람들이 우려하는 많은 문제는 주로 제한된 공간에 많은 너구리가 살게 되면서 발생한다. 이미 다른 너구리가 공간을 모두 차지하고 있어서 특정 너구리가 갈 곳을 잃게 되면 도시를 헤매다 차량 충돌로 죽는 것이다. 너구리를 죽이거나 아프게 하는 개선충 역시 밀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현재까지 추적 중인 너구리 사망 원인은 도시와 시골에서 그 양상이 다르다. 우리 팀이 현재까지 추적한 너구리 총 36마리 중 8마리가 죽었는데, 각각 원인을 추적했다. 도시의 경우 개선충이 죽음의 배경인 사례가 많았지만, 직접 사인은 모두 차량과의 충돌이나 추락 등이었다. 우리 인간이 직접적인 원인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으로서 조금은 책임을 느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도시에서 너구리를 살찌우는 것도, 그들의 숨을 거둬가는 것도 우리 인간이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죽음을 맞이한 너구리. 서서울호수공원에 살다 독립을 위해 부천으로 향했지만 추적 19일 만에 숨을 거둔 것을 발견했다.

나 또한 이 땅의 너구리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삶과 죽음에 개입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알아서 적절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너구리에게 적절한 삶이란 자연에서 스스로 먹이를 찾고, 너구리끼리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병 없이 건강한 상태다. 인간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거나, 도시 먹이원에 의존해 밀도가 높아져 인간과의 갈등이나 전염병 창궐과 같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보이지 않는 자연에서 우당탕탕 귀여운 너구리가 사람과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저 먼 곳에서 흐뭇하게 웃는 우당탕탕 연구자로서 그들의 삶과 죽음을 이해하기를 바랄 뿐이다. 또한 사람들이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너구리를 미워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다가가 인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만들지도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이 땅이 우리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다른 야생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한 걸음 떨어져 그들과 거리두기를 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툰드라에서 최서윤 연구원

작성 최서윤 서울대학교 산림과학부 야생동물학 박사과정 연구원
편집 임병선 살아지구 기자

임병선 기자 bs@disappearth.org 메일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