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 우리는 어떤 시대에서 살고 있는가

인류세 : 우리는 어떤 시대에서 살고 있는가
자연에서 인간의 흔적을 찾는 영국인 닐 커밍스의 작업물 사진 -flickr

편집자 주 - 살아지구는 ‘구구구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구구구 프로젝트는 ‘연구가 지구를 구한다’의 줄임말입니다. 연구가 지구를 구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살아지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인 ‘모든 생명이 더 살기 나은 세상’은 지금의 제도만 잘 지키거나, 인간과 지구의 관계를 유지한다고 만들 수 없습니다. 학문이 새롭게 발견한 새로운 사실을 기반으로 우리 사회가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때 비로소 ‘모든 생명이 더 살기 나은 세상’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살아지구는 연구자와 기자의 협력 모델을 선택했습니다. 학문이 추구하는 정밀성과 언론이 추구하는 대중성을 결합하기 위해서입니다. 살아지구는 구구구 프로젝트를 통해 그동안 널리 알려지지 않고 학문 영역에서 다뤄지던 ‘지구를 구하는 데 필요한 소식들’을 알기 쉽게 전합니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슬기 인류세연구센터 학생연구원은 인간과 지구의 관계를 되돌아보는 '인류세'를 연재합니다. 지금까지 인류와 지구의 관계에서 인간은 일방적으로 지구를 병들게 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이 인류세라는 한 학문에 모여 '진단'부터 '처방'까지 도모합니다.

살아지구의 구구구 프로젝트는 ‘지구를 구하려는 연구자들’에게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기후, 생태 문제는 결국 인간에서 비롯됐다. 600만 년 전 지구에 등장한 인류는, 어느새 지구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영향력을 얻었다. 학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의 활동으로 지구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행위자(Agent)가 됐다는 의미다. 한 사람이 보기에 600만 년은 긴 기간이지만 공룡이 지구를 지배하던 시대를 약 1억 6000만 년이라고 생각하면, 지구 역사에서 인류의 역사는 매우 짧다.

‘인류세’는 인류가 지구 역사를 바꾸고 있는 지금을 지구 역사의 다른 시대들과 구분될 만큼 특징이 분명한 하나의 시대로 봐야 한다는 개념이다. 

인류세는 지구 역사에서 인간의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그러니까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가 지구와 어떤 관계를 맺어 왔고 또 어떻게 맺어갈 것인가를 탐구하는 데 유용한 개념이다. 

인류세를 연구하면서 다른 사람, 심지어 과학을 공부하는 다른 학과 동료들에게도 인류세를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이 많다. 정의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는 용어기도 하고, 다른 학문이나 예술 등과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의미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 모두가 지구와 자신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 지금, 인류세라는 개념은 여러 이점을 가진다.

지구 역사에는 짧은 순간, 그럼에도 인간은 ‘인류세’를 만들었다

인류세가 무엇인지부터 설명하면 ‘인류세’에서 ‘인류’라는 말은 이 글을 읽는 우리 모두, 그리고 과거에 살던 사람까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세’는 무엇을 의미할까.

영화 ‘쥐라기 공원’의 쥐라기는 지구의 긴 역사 속 하나의 시기를 의미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쥐라기 공원은 쥐라기 시대 풍경을 재현한 공원이다. 지구가 입을 열어 ’어떤 시기는 쥐라기다‘라고 말한 건 아니지만, 과학자들이 각 시대의 특징을 파악해서 정리한 결과다. 한 사람의 인생을 유년, 청년, 중년, 노년 등으로 구분하듯 지구의 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했다.

지구의 나이를 4억 6000만 년으로 추정하는 만큼 사람의 일생보다는 구분이 더 세밀하다. 가장 큰 분류인 ‘누대’ 안에서 ‘대‘를 나누고, ’대‘는 다시 ‘기’로, ’기‘는 또 ’세‘로 나눈다. 그중 영화에 등장하는 ‘쥐라기’는 공룡이 지구를 지배한 시대인 ‘중생대’를 3개로 나눌 때 중간 시기에 해당한다. 현재 기준 2억 130만 년 전부터 1억 4500만 년 전까지 5350만 년 동안이다. 쥐라기는 다시, 오래 전에 나타난 순서대로 리아스세, 도거세, 말름세로 나뉜다.

즉 인류세의 ‘세‘는 지구 역사의 한 기간을 의미한다. 지구시스템학, 지질학 등을 연구하는 일부 과학자는 인류가 지구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지금 시대를 ‘인류세’로 구분한다. 지질학자들이 국제적으로 합의한 현재 시대는 현생누대-신생대-제4기-홀로세인데, 일부 과학자가 인류가 살고 있는 지금을 ‘인류세’로 새롭게 이름 붙이자고 제안했다. 인간의 행위가 ‘홀로세’를 끝내고 ‘인간 시대’를 시작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인류세가 시작됐나를 두고는 인류세 연구자 사이에서도 여전히 논의 중이지만, 대체로 2차 산업혁명이 일어난 1950년부터를 인류세의 시작으로 보는 의견이 다수다. 인류 역사와 비교하면 사실 짧은 기간이지만, 이때부터 인간이 지구 시스템을 바꾸는 힘과 지구를 변화시킨 정도가 컸다는 것이다. 1950년대 이후로 인간 행위가 지구 시스템을 급격하게 변화시킨 ‘대가속기’에 들어가게 됐다.

지구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대가속기'의 큰 요소 중 하나는 화석연료 사용이다

인류가 지구를 ‘사용하며’ 남긴 찌꺼기를 보는 인류세

스마트폰을 하나 구매했다고 해보자. AI 기능까지 탑재된 스마트폰은 분명 우리의 더 편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나 이 편안함에는 찌꺼기가 남는다. 우선 새 스마트폰이 담겨있던 박스와 같은 포장재가 남는다. 그리고 내가 이전에 사용했던 핸드폰은 하나의 전자폐기물이 되어버린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도 찌꺼기는 계속 만들어진다. 내가 스마트폰을 충전하면서 사용되는 전기는 어딘가에서 이산화탄소를 만들어내고 내가 스마트폰 케이스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된다.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은 어딘가에서 찌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인류세는 이 찌꺼기들을 살펴본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휴대폰은 커다란 박스 안에 플라스틱 비닐로 포장돼 나왔다. 그러나 최근 출시되는 전자제품 포장은 작은 종이 박스와 종이 띠 등으로 대체됐다. 종이와 비닐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의 정도 차이를 차치하고 보면 삶을 발전시키리라 기대하며 ’휴대폰‘을 구매했을 때, 이 물건이 발생시키는 ’플라스틱 쓰레기‘라는 찌꺼기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2020년 삼성전자의 휴대폰 패키지 사진 삼성전자

과학과 기술은 진보와 발전을 좇는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새로운 것을 찾고, 더 자세히 알고, 탐구한다. 반면 인류세라는 개념은 뒤에 남겨진 것을 본다. 진보와 발전 뒤편에는 여러 찌꺼기가 생긴다. 

인류세를 공식적인 지질시대로 만들기 위해서 인류세 연구자들은 인간이 만든 여러 찌꺼기 중 플루토늄에 주목했다. 1950년대에 이뤄진 핵실험의 흔적과 방사능 낙진은 캐나다에 있는 크로퍼드 호수의 퇴적층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연구자들은 이 핵실험 찌꺼기를 인류세의 주요 표지로 제시했다. 

인류세의 찌꺼기는 이 호수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인간에 의해 크게 변했고, 변하고 있는 자연물은 ‘기후’다. 인류가 화석연료를 이용해 에너지를 얻는 방법을 보편적으로 쓰면서 발생한 탄소 찌꺼기는 기후변화로 이어졌다. 기후변화는 찌꺼기를 만드는 데 많이 기여한 사람보다 별로 기여하지 않은 사람을 더 위협하고, 아무런 찌꺼기를 만들지 않는 산호, 조류 등 자연물을 위협한다. 인류세는 인간 사이의 불평등,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불평등을 더 심화시킨다.

인류세라는 개념을 활용하는 사람들은 인류가 진보와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동원한 자원, 자원을 사용하면서 사라진 자연은 무엇인지,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누구인지 살핀다. 즉 인류가 지금까지 지구를 활용해 해온 여러 가지 일을 바라보는 데 유용한 개념이다.

지구를 이용물로만 보던 기존 세계관을 향한 불만, 인류세로 모이다

사실 과학적으로 무엇이 인류세고, 무엇이 인류세가 아니다 라고 딱 잘라 정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인간의 활동을 종합적으로 반성하며 보는 데 중요한 개념임은 분명하다. 인류세라는 개념을 통해 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지구와 인간 사이 관계의 기존 관점에 불만이 있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인류세 개념은 학계,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지구와 인간 관계를 의문시하는’ 사람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하나의 학문 표준(Discipline)으로는 특히 환경, 지구 전체와 관련한 문제를 설명하기 어렵다. 기존에 놓친 문제를 다양한 시각으로 살피려면 여러 학문 연구자 간 소통을 해야 하는데 인류세는 그런 시도를 할 창구를 열어준다.

한국 과학의 첨병이라고 볼 수 있는 카이스트에 인류세연구센터가 있다는 데도 의미가 있다. 올해 인류세를 상징하는 미디어아트를 카이스트 본관 외벽에서 상영했다. 진보와 발전을 강조하는 학교에 인류세에 관한 이야기가 크게 울려퍼졌다. 

강이연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교수팀이 카이스트 본관 벽에서 상영한 인류세 주제의 미디어아트 사진 카이스트

평소 사람들은 자신과 지구의 역사를 별개로 인식한다. 지구의 역사라고 하면 공룡이 언제 등장했다 사라졌다든가, 어떤 생물이 지구를 지배했다든가 하는 얘기와 같이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을 상상한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간으로서 하는 행위는 지구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인류세에 사는 인간인 우리가 인류세라는 개념으로 자신과 지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고, 미래를 구상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인류세를 국제적인 지질시대 구분으로 등록하려는 시도는 2024년 9월 국제층서위원회 회의에서 부결됐다. 국제적으로 쓰이는 지질시대를 합의하는 기구인 국제층서위원회는 인류세를 공식 지질시대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결정문을 공지했다. 결정문은 아래 문장으로 끝맺는다. 

“인류세 개념은 그럼에도 계속 쓰일 것입니다. 지구과학 연구자와 환경과학 연구자뿐만 아니라 사회학자, 정치인, 경제학자에게도 말입니다. 물론 대중 일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세는 지구 시스템에 대한 인간의 영향을 설명하는 유용하고 대체할 수 없는 개념으로 지속될 것입니다.”

"Anthropocene will nevertheless continue to be used not only by Earth and environmental scientists, but also by social scientists, politicians and economists, as well as by the public at large. It will remain an invaluable descriptor of human impact on the Earth system."

인류세 공식화는 부결됐지만, 국제층서위원회 결정문으로도 알 수 있듯이, 인류세라는 개념은 우리가 자원을 쓰고 찌꺼기만 남기는 방식으로 지구와 맺어온 기존 관계를 돌아보게 할 것이다. 

이슬기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학생연구원/박사과정

작성 이슬기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학생연구원/박사과정
편집 임병선 살아지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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